책 추천 썸네일형 리스트형 최은영, 그 여름 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그 위선적인 말들을 이경은 기억한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이에게 이경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수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 더보기 김영하, 오직 두 사람 그해 여름, 주말의 대형마트는 혼잡했다. 명절이 코앞이었다. 윤석과 아내 미라, 그리고 세 돌을 갓 지난 아들 성민을 태운 쇼핑 카트가 무빙워크를 타고 지하에 있는 매장을 향해 내려간다. 남은 평생 동안 반복하여 떠올리게 될 장면이지만 그때로써는 알 리가 없다. (중략) 보안요원을 따라 들어간 방에는 수십 대의 모니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니터들은 오직 대형마트 안의 매대들만을 비추고 있었다. 외부 임대 매장인 휴대폰 가게를 비추는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이 매장 안으로 벌써 세 번째 울려퍼졌다. 반향은 없었다. 방목하는 양떼처럼, 수백 대의 카트들이 매장 안을 평화롭게 소요하고 있었다. 미라는 그들 사이로 헤치고 들어가 소리치고 싶었다. 왜 아무도 방송을 듣지 않아요? 여러분도.. 더보기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_본문에서 내가 읽은 김연수 작가의 첫 소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김연수 작가는 이미 유명했지만 당시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고전문학 한 번 읽어보겠다며 책과 씨름하느라 국내의 좋은 소설을 많이 놓치고 있던 때였다.아무튼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나를 사로잡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이 문장을 듣자마자 내용도 모른 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책의 화자인 카밀라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이다. 어느 날 카밀라에게 상자 하나가 배달되고 그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다. 사진은 한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를 안.. 더보기 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회사 다닐 적 내 소원은 ‘일만 하고 싶다’였다. 이미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있지만, 무의미한 회식이 너무 많았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말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회식은 모두가 힘들어하고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끝없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회식이 아니라 얼차려였다. 그 덕에 가뜩이나 바쁜 일을 처리할 시간과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입만 열면 바쁘다 말했지만, 그 이유는 늘 새벽까지 술 마시고 다음날 기운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도 같은 부서 동기 한 명은 회식이 끝나고 꾸역꾸역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일을 했다. 눈은 풀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저는 일을 덜 끝내서 사무실에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부장은 “야 좀 살살 해!”하며 핀잔주듯 칭찬했다. 행여나 부장의 .. 더보기 릴리 프랭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이 이야기는 오래전에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상경했었고 결국 떨려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던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나왔다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나,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환상을 품은 일이 없는데도 도쿄까지 따라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도쿄 타워 중턱에 영면(永眠)한 내 어머니의 조그만 이야기다. _본문 시작에서 일본의 다재다능한 작가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릴리 프랭키는 작가로도 유명하지만 삽화가이자 배우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본명은 나타가와 마사야(中川 雅也). 2005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건 단 한 줄의 소개 때문이었다.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전철 안에서 읽는 건 위험하다.’ 이 한 문장에 홀려 책을 읽었고 지금은 내.. 더보기 최은영, 그 여름 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그 위선적인 말들을 이경은 기억한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이에게 이경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수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 더보기 J. M. 바스콘셀로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사랑하는 마누엘 발라다리스 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마흔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리움 속에서 어린 시절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언제라도 당신이 나타나셔서 제게 그림 딱지와 구슬을 주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가, 제게 사랑을 가르쳐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구슬과 그림딱지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 안의 사랑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절망할 때가 더 많습니다.그 시절, 우리들만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더보기 황석영, 해질 무렵 수년 전에 전태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서 그에 관하여 증언했다.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항의는 대부분 알려진 사실들이었지만, 함께 편집된 옛날 필름 속에 흘러가는 평화시장 주변 거리와 사람들의 행색은 그 시대를 생각나게 했다.그런데 제작자는 당시의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고용했던 사장을 용케 찾아내어 등장시켰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평범한 아파트의 소파에 앉아 말하고 있었다.나도 어려웠다고, 그때 재봉틀 몇 대 가지고 시작했다고.기자가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당시의 소감을 묻자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노인이 얼굴을 드는데 카메라가 그의 누가에 번진 물기를 잡아냈다.그들의 형편을 전혀 몰랐다고, 그럴 줄 알았으면 좀더 잘해 줄 걸 그랬다..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