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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지 않은 소설/서울집, 대전집, 광주집

[예민한 손] 얼굴 잔털 제거와 아내의 칼솜씨

[대전집]


내 얼굴에는 털이 많이 난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일명 '얼굴털 관리칼'이라는 게 있다. 잔털을 그대로 두면 스멀스멀 올라와 어느새 얼굴이 마치 탄 것처럼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수염에 버금가는 굵은 털이 뺨 주변에 난다는 점이다. 찬호박처럼 멋있게 나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겠지만 뺨 사이사이에 듬성듬성 난다. 이틀이상 그대로 두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 저 사람은 왜 뺨 한가운데에 수염이 나지?"

수염을 포함한 굵은 녀석들은 면도할 때 삭 밀어내면 해결이 된다. 그러나 잔털은 면도칼로 밀면 상판이 상한다. 중이 제 머리 못깎는 격이다.

잔털은 아내가 관리해준다. 주말이 되면 "곰돌이 얼굴털 밀자" 한다. 그럼 젤과 커트칼을 들고가서 얌전히 곁에 눕는다. 이 잡초들은 방치하면 결국 얼굴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매주 한번씩은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넓적한 얼굴에 뭉뚝한 코, 두툼한 입술. 영락없는 아프리카계 인간이다. 우리는 내 얼굴을 보면서 유발 하라리의 '인간'을 이야기한다. 나는 고생인류의,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혼합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지금 우리집에 나만큼 얼굴 큰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아주 극원초적인 유전자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 어글리한 상판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낀다.

젤이 얼굴에 축축히 스며들면 착착 칼이 감겨들어온다. 갈대밭을 날카로운 낫으로 밑둥까지 밀어내면 시원한 쇳바람이 인다. 특히 눈썹과 눈썹 사이, 눈썹부터 번져가는 잡초들은 꼼꼼하게 작업이 들어간다.

조심조심 작업을 마치면 세면대로 가 따듯한 물에 얼굴을 씻는다. 그리고는 다시 아내가 미스트를 얼굴 전체에 착착 뿌려준다. 비가 내린다. 잠시 현대인이 되었다. 뭔가 경건한 의식인 것 같은 기분이다.

예민한 칼.
예미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