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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지 않은 소설/젠틀하지 못한 익선동

아빠의 청춘이 담긴 곳, 광화문거리


아빠에게 출판사에 대해 물으면, 아빠는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나중에...시간이 많이 지나면 말해줄게.” 이 한 마디 뿐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30-40대 아빠의 삶은 내가 보고 느낀 것, 또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빠는 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예전 다니시던 출판사에서 매번 ‘이 달의 독서왕’에 뽑혔다고 했다. 출판사 도서관의 거의 모든 책을 다 빌려 봤다고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책들은 모조리 읽고 또 읽어 외워버렸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서예와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아직도 서울집에 옛 도록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시 아빠의 열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빠는 회사를 나와 당신의 출판사를 차렸다. 창덕궁 앞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새문안교회 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하얀 3층 건물의 아빠회사가 보였다. 1층에서 경비 아저씨가 늘 반가운 인사로 맞아주셨고, 2층으로 올라가면 수십명의 직원분들이 286컴퓨터 앞에서 무언가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꼬마가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와서는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주며 말동무를 해주셨다. 어두컴컴한 사진실 구경이 제일 재미났다. 새로 나온 디자인책을 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3층으로 올라가면 파티션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고, 좌측 창가 맨 끝에 검고 두툼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한 손에는 책을 쥐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빠의 전성시대’는 15년을 채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한 차례 부도위기를 모면했지만, 곧이어 두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규모를 줄여 사직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지만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쯤이었던 것 같다. 적막이 감도는 저녁상 앞, 엄마도, 아빠도 수저를 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거에요...?”. 아빠는 천장을 올려봤다. 아빠의 왼쪽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빠는 말없이 소주만 드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익선동 살림을 정리하고 계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것이 서울을 떠날 준비 단계라는 걸 나는 뒤늦게서야 알았다. 외할머니가 상경하여 우리 남매를 돌봐주셨다. 엄마아빠를 주말에만 보는 날이 늘어났다. 그것이 곧 내 인생 최악의 ‘부천 3년’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계동에서 행복한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둘째였다. 매일 먹어도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뭐 먹을래?” 물으시면 대답은 한결같이 “된장찌개요” 였다. 할머니는 헛웃음을 지며 무슨 애가 이렇게 맨날 똑같은 것만 먹냐하시며 두부 송송 보글보글 된장국물에 파를 쳐서 알타리무와 함께 독상을 차려주셨다.

첫째는 짝사랑했던 누나의 집에 보다 가까이 살게 된 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상사병을 앓았다. 누나(실명 엄금)와 매번 투닥투닥했지만 어디까지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제스처일 뿐이었다.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해가 지기 전에 창밖을 열고 누나가 사는 동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에 파묻혀 방바닥에 이 책 저 책 꺼내어 널브러뜨리면 아빠는 꼭 한마디씩 했다.

“그러다 책 상한다. 책은 책장에 넣어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책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정비석의 삼국지를 제일 좋아했다. 여섯권짜리 옆으로 내려읽는, 3,600쪽의 책을 정독하고 또 정독했다. 제갈량이 죽고 난 후에 그의 사후 계략에 따라 마대가 위연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손끝이 저리도록 남아있다.

한 때, 맨돌이가 술자리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다’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종종 삼국지의 문구를 인용했다. “승상도 하지 못한 일을 어찌 함부로 도모할 수 있겠소. 지금은 공성이 아니라 수성을 할 때요.” 공명의 뒤를 이은 비위가 대장군 강유에게 했던 말이다.

갖고 있는 것을 잘 지키라고 다독이면 맨돌이는 항상 무언가를 분주하게 하고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는 강유처럼 어쩔 수 없이 ‘출사표’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해줬다. 스스로 정복하여 일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척박한 나를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서울역사박물관에 갈 일이 생기면 20분 정도 여유시간을 갖고 간다. 잠시 새문안교회 앞에 서서 아빠의 옛 회사 터를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