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지 않은 소설/젠틀하지 못한 익선동 썸네일형 리스트형 82년생 익선동-운현초교, 재동초교, 교동초교 영뽀와 나는 1982년 같은 해, 익선동 중앙병원(지금의 떡 박물관)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다. 엄마끼리 둘도 없는 친구였던 까닭이다. 운현유치원에 같이 들어가 운현초등학교에서 같이 수학했고, 이어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함께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입학했다. 영뽀는 우리 인생에 있어 익선동에서 살았다는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곳에서 쌓은 친구들과의 교분이 훗날 거대한 ‘종로 친구 집단’을 형성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익선동의 핵심은 통학권의 중심 지점이라는 데 있다. 익선동과 천도교당 사이에 난 큰길을 두고 위에서부터 재동초교, 운현 초교, 교동초교가 일직선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이곳에.. 더보기 세 개의 문방구집 익선동에는 세 개의 문방구가 있었다. 첫째 문방구, 둘째 문방구, 셋째 문방구. 문방구 이름은 있었지만 우리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저 학교에서 가까운 순으로 그렇게 불렀다. 세 문방구는 교동 초교와 낙원상가 길 사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땐 재동/교동 국민학교에 한 학년에 열 몇개 반이 있었고 반마다 애들이 50명씩 있을 때라(운현초교는 제외 : 전교생 180명) 세 곳의 문방구가 그럭저럭 먹고 살만했던 것 같다. 각 문방구는 규모도 달랐고 생존방식도 달랐다. 첫째 문방구가 제일 작았다.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가 운영했는데 학생들에게 참 친절했고, 무엇보다 학교 숙제에 필요한 기초 교구들이 대부분 다 있었다. 그래서 탐구생활이니 과학실험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죄다 그 집.. 더보기 아빠의 청춘이 담긴 곳, 광화문거리 아빠에게 출판사에 대해 물으면, 아빠는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다. 단지 “나중에...시간이 많이 지나면 말해줄게.” 이 한 마디 뿐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30-40대 아빠의 삶은 내가 보고 느낀 것, 또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빠는 책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예전 다니시던 출판사에서 매번 ‘이 달의 독서왕’에 뽑혔다고 했다. 출판사 도서관의 거의 모든 책을 다 빌려 봤다고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책들은 모조리 읽고 또 읽어 외워버렸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서예와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아직도 서울집에 옛 도록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시 아빠의 열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빠는 회사를 나와 당.. 더보기 익선동 골목길을 누비던 아저씨들 엄마는 내가 아주아주 어렸을 적부터 ‘인사하기’를 무지하게 시켰다. 그래서 어디를 가던 ‘이 분은 누구시란다 안녕하세요 해야지’ 하면 나는 구십도로 “안녕하세요!”를 크게 외쳤다. 그래서 항상 동네에서 인사를 가장 잘 하는 아이로 통했다. 우리 집 골목 앞에는 서울우유 영업소가 있었다. 할아버지 내외분이 운영하셨는데 나를 유독 예뻐해주셨다. 할아버지는 항상 “어이구 우리 손주 왔구나! 꼬추 얼마나 컸나 보자!” 하시면서 품에 안고 둥가둥가 놀이를 해주셨다. 나는 ‘서울우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른 아침이면 두부를 파는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았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준 돈을 들고 나가 ‘안녕하세요 두부 하나 주세요’ 하면 아저씨가 검은 비닐 봉지에 담아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더보기 운현궁 양관의 ‘마지막 주인’ 운현궁 양관의 ‘마지막 주인’은 운현초교 1기생들이었다. 1986년, 이곳은 문화재가 아닌 교실이었다. 여기서 선생과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했다. 지금의 운현초교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도 애들은 옛 교실 주변을 기웃대며 놀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개구멍을 찾았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수풀 속을 파고들었다. 나무가지 사이로 아주 작은 문 하나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리를 풀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주 낡은 기와집 하나가 보였다. 꼬마 서너무리가 살금살금 집 여기저기를 정탐을 하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구냐?” 하며 하얀 소복을 입은 할머니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귀신이다!!!” 빽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도망나왔다. 그 때부터 그 집은 ‘귀신의 집’이.. 더보기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익선동 골목길 1996년, 윤종신의 ‘환생’이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노래가사보다 앨범자켓에 보이는 익선동의 한 식당이었다. ‘맨 회사아저씨들 점심먹으러 다니는 집 앞에서 무슨 개폼이지?’ 픽 혼자 웃고 말아버렸다. ‘강호’라는 식당은 익선동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다. 운현초교와 교동초교 사이길로 쭉 들어오는 길. 지금은 맛집 탐방의 스타트로 자리잡은 길. 나에게는 등하교길이었다. 그리고 탈출의 길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번은 익선동 전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었다. 전단지 만드는 집에서 화재가 났는데 하필 그 집 옆이 동네 가스집이었다. 수십개 LPG 가스통이 빼곡히 들어선 집으로 불길이 닿지 못하도록 소방관 수십명이 달라붙어 세 시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막아냈다. (나중에 와보니 아저씨.. 더보기 ‘어쩌다 어른’ 유현준- 겉으로만 훑은 익선동을 말하다. ‘어쩌다 어른’에 유현준 씨가 나왔다. 익선동 골목길이 뜨는 진짜 이유가 “하늘이 있냐 없냐의 차이”란다. 웃음이 난다. 익선동 골목길에서 하늘을 보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보일 것 같이 이야기한다. 여기 한번 10년 정도 살아보면서 골목길 좀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 익선동이라 부르는 골목길은 대부분 낙원상가옆에 위치한 장소인데(그래서 엄밀히 익선동도 아니다) 당최 하늘을 볼 여유가 없다.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재편성해서 뚫어버렸다. 아마 지금쯤 가면 에버랜드 놀이기구 기다리는 기차놀이하며 걸어가고 있을거다. 내가 본 익선동 골목길은 개똥 피해다니느라 하늘은 커녕 바닥만 눈으로 훑어가는 길이었다. 국민학교 철조망 틈 사이로 뛰어내려 집으로 빨리가는 지름길, 피아노 학원 가기 싫.. 더보기 북촌한옥마을이라는 환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경복고등학교에서 청와대를 건너오던 하교 길, 그곳에서 바라보는 오늘날 우리가 이름 붙여준 '북촌'의 풍경은 그야말로 난민촌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게딱지만한 기와집들이 숨쉴틈도 없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꼴이란 그곳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고도제한구역이라지만 그래도 '국가의 얼굴' 주변이 이 꼬락서니여서 야 내가 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비참했던 그 지경이었다는 말이다. 무슨 아름다움이니 뭘 지켜야 한다느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그냥 시골 동네 못지않은 칙칙한 곳이었다. 북촌의 탄생은 인사동의 포화상태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애초부터 자본의 확장이 마을의 '격'.. 더보기 누가 익선동을 젠틀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이론은 많은 것들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론은 많은 것들을 화석화시켜 정의하고, 많은 것들을 가려내어 안내한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그중 하나이다. ‘값싼 작업공간을 찾아 예술가들이 어떤 장소에 정착하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역의 문화 가치가 상승하면, 개발자들이 들어와 이윤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위 내용을 놓고 보면 우선, 선후 과정이 바뀐 경우가 더 많다. 개발자들이 먼저 붐업할만할 곳을 물색하고 입소문을 퍼뜨린다. 이른바 ‘미학’의 주문이다. 가만히 넋 놓고 있는 담벼락 하나도 낭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블링블링하게 윤색하여 입김을 불어넣어주는 자들이 땅값 올리는 데 가장 크게 한몫한다. 그들의 이름은 학자이다. 가장 큰 개발 공헌자이다. ‘이곳은 수퍼맨이 태어난 장소이고, 또 요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