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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지 않은 소설/젠틀하지 못한 익선동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익선동 골목길


1996년, 윤종신의 ‘환생’이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노래가사보다 앨범자켓에 보이는 익선동의 한 식당이었다. ‘맨 회사아저씨들 점심먹으러 다니는 집 앞에서 무슨 개폼이지?’ 픽 혼자 웃고 말아버렸다.

‘강호’라는 식당은 익선동 시작점에 위치하고 있다. 운현초교와 교동초교 사이길로 쭉 들어오는 길. 지금은 맛집 탐방의 스타트로 자리잡은 길. 나에게는 등하교길이었다. 그리고 탈출의 길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번은 익선동 전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었다. 전단지 만드는 집에서 화재가 났는데 하필 그 집 옆이 동네 가스집이었다. 수십개 LPG 가스통이 빼곡히 들어선 집으로 불길이 닿지 못하도록 소방관 수십명이 달라붙어 세 시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막아냈다. (나중에 와보니 아저씨 얼굴들이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다)

‘가스집에 불났다! 불났다!’ 소리에 전 주민이 그 ‘강호길’로 좀비떼처럼 줄행랑을 쳤다. 안국역 인근까지 수백명의 주민들이 대피해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업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리고 그 사이, 불현듯 스치는 한 사람. 치매를 앓고 있던 고모할머니를 두고 나왔다.

갑자기 아빠가 “할머니 두고 왔잖아!” 하며 나를 내려놓더니 다시 동네로 뛰어들어갔다. “그냥와! 그냥와!” 발을 동동구르며 소리지르는 엄마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한 오분쯤 지나서인가, 길의 시작점에서 아빠가 할머니를 업고 두두두두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슨 홈세이프를 외치는 감독처럼 막 손짓을 해대며 아빠를 불렀다.

한참 지나 소방관 한 분이 터덜터덜 길에서 나와 “불껐어요. 들어가세요” 하자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천길을 돌아 다시 환생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