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TV에서 본 만화를 잠시 늘어놓자면 이렇다. 쥐라기 월드컵, 축구왕 슛돌이, 베르사유의 장미, 피구왕 통키, 전설의 용사 라무, 번개 전사 슈퍼 그랑죠, 몬타나 존스, 시간탐험대, 미래 용사 볼트론, 은하철도 999, 메칸더 V, 꾸러기 수비대, 로봇 수사대 K캅스, 아벨 탐험대. 이밖에도 더 굵직굵직한 만화들이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이 정도다.
인기가 좋았던 이 만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일본 만화라는 것. 이제와 만화의 국적이 무슨 상관있겠냐마는 당시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알았던 통키가 일본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피구왕 통키의 원제는 ‘불꽃의 투구아 도지 단페이(炎の闘球児 ドッジ弾平)’로 ‘폭주 형제 렛츠&고(국내에서는 1998년 ‘우리는 챔피언’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의 작가인 코시타 테츠히로가 그린 만화다.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제목들도 국내 방영 당시 변경된 이름이다.
로봇 변신이 인상 깊었던 그랑죠는 ‘마동왕 그랑조트(魔動王グランゾート)’, 시간여행을 한다는 재밌는 설정의 시간탐험대는 ‘타임 트러블 돈데케만!(たいむとらぶるトンデケマン!)’, 신나는 주제가의 전설의 용사 라무는 ‘엔지 나이트 라무네 앤드 포티(NG騎士ラムネ&40)’, 우리들에게 십이간지(十二干支)를 외우게 해 준 꾸러기 수비대는 ‘십이전지 폭렬 에토레인저(十二戦支 爆烈エトレンジャー)’가 원제다. 은하철도 999나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원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왜색(倭色)을 지우기 위해 변경되었다.
제목은 바뀌었지만 이 만화들은 하나같이 국내에서 인기가 높았다. 특히 꾸러기 수비대는 내용보다 주제가가 더 유명한 작품인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만화 주제가를 부름으로써 십이간지를 외울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꽤나 교육적인 노래였던 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이 만화들이 한국에서 얻은 인기에 비해 본토인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피구왕 통키, 꾸러기 수비대, 전설 용사 라무, 축구왕 슛돌이 등 한국에서는 모두 내로라하는 작품이지만 일본에서는 전부 흥행에 참패했다.
통키는 90년대 초반 피구 열풍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TV도쿄 계에서 방영, 지방에서는 방송되지 않았고 시간도 애매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독수리 슛으로 유명한 슛돌이는 인기 만화였던 캡틴 츠바사(キャプテン翼)의 아류작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인기몰이에 실패했다.
한 유투버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길거리 설문을 한 적이 있다. 설문에 응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의 만화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소 충격적이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다.
90년대 한국에서 만화는 그저 애들이나 보는 문화였다. 만화에 큰돈을 들이는 방송국이 흔치 않았다. 때문에 인기가 없는 작품을 싼값에 수입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는 이 만화들이 대박을 친 것이다.
훗날 만화 전문채널인 투니버스가 개국하면서 일본의 인기 만화들이 방영되기는 했지만 이전까지는 싼 맛에 수입한 만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기 어려운 정서의 만화가 방영됐던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사실 이제와 내가 본 만화의 인기 유무나 국적, 가격 등은 별로 중요치 않다. 한국인 통키나 일본인 탄페이나 내게는 모두 소중한 추억일 뿐이다.
그 시절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 | TV 만화의 숨겨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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