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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묵묵한 열정의 피아니스트, 임동민 일명 '동 브라더스'라 일컬어지는 피아니스트 임동민, 임동혁은 2005년 쇼팽 콩쿨에서 2위 없는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이후 동생 임동혁은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후광을 입고 쇼팽을 타이틀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동생과 달리 형은 무언가 돋보이는 쇼맨쉽 하나 없이, 딱히 뭐라 꼬집을만한 음반 하나 내걸지 않은 채, 줄곧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그래서 난 단순히 재능의 차이에서 비롯된 형의 의기소침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임동민의 베토벤 소나타 앨범만 듣고 있다. 구성은 31번, 23번 '열정', 14번 '월광'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식인데 그 중에서도 단연 23번이 눈에 띈다. 랑랑의 '열정'이 폭발이라면, 동민의 '열정'은 만반의 준비라 할 수 있겠다. 어.. 더보기
쇼팽의 정석을 짚는 남자, 폴리니 '쇼팽의 정석' 폴리니가 쇼팽 발라드 앨범을 냈을 때 수많은 팬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폴리니 특유의 얼음장 같은 냉철한 타건이 상당 부분 흐려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교의 쇠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젊은 시절 같지 않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폴리니의 쇠퇴'를 순전히 나이탓으로만 볼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더 나이를 잡수신 이후에 녹음한 폴리니의 쇼팽 녹턴 전집을 들어보면 페달을 깊게 눌러 완전히 낭만주의적인 선율로 빠져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리히테르가 젊은 폴리니를 두고 '감정 없는 연주'라고 매몰찬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그때와 비교해보면 완전히 다른 폴리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악보 전체에 점차적으로 감정이 퍼져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감지할 수 있다. 기교가.. 더보기
꿈을 노래하다-나훈아, 조용필, 박효신 사랑이야기를 뺀, 한국 가요사에서의 '꿈' 노래에는 고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왜 고독하죠?'라는 질문에 나훈아('72/꿈속의 고향)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문안드릴 기약이 없어서라며 하늘의 별을 세는 것으로 슬픔을 달랜다. 꿈은 어머니다. ​ 조용필('91/꿈)도 고향을 그리기는 마찬가지다. 남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지만, 나만 내려갈 수 없는 그 비통함을 이야기한다. 다만, 별을 세지 않고 별에게 묻는다. 나의 꿈을 아느냐라고. 고향의 향기만 맡을 뿐, 구체적으로 고향의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꿈은 화려한 도시에서의 성공이다. ​ 박효신('16/꿈)의 꿈은 나를 본다. 누군가를 의식하여 느끼는 소외감이 아니다. 자아와 끊임없이.. 더보기
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회사 다닐 적 내 소원은 ‘일만 하고 싶다’였다. 이미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있지만, 무의미한 회식이 너무 많았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말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회식은 모두가 힘들어하고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끝없이 이어졌다. 이 정도면 회식이 아니라 얼차려였다. 그 덕에 가뜩이나 바쁜 일을 처리할 시간과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입만 열면 바쁘다 말했지만, 그 이유는 늘 새벽까지 술 마시고 다음날 기운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도 같은 부서 동기 한 명은 회식이 끝나고 꾸역꾸역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일을 했다. 눈은 풀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저는 일을 덜 끝내서 사무실에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부장은 “야 좀 살살 해!”하며 핀잔주듯 칭찬했다. 행여나 부장의 .. 더보기
설날 맞이 떡국 이야기 설날에 먹는 대표적인 전통음식으로 맑은 육수에 떡을 넣고 끓인 요리다. 떡국을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 등의 문헌에서 차례 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기록돼있어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떡국을 먹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이유로는 음복설이 강하다. 오래전부터 신년 차례 상에 올린 떡국을 음복하게 되면서 설날=떡국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싶다. 떡국은 국물요리인만큼 육수가 맛의 절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는 소고기 양지머리로 멀겋게 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소를 함부로 도축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주로 꿩을 이용해 맛을 냈다. 이마저도 없을 때엔 닭을 이용했다. 해안가 지역에서는 멸치, 북어, 굴, 매생이를 넣어.. 더보기
릴리 프랭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이 이야기는 오래전에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상경했었고 결국 떨려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던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나왔다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나,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환상을 품은 일이 없는데도 도쿄까지 따라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도쿄 타워 중턱에 영면(永眠)한 내 어머니의 조그만 이야기다. _본문 시작에서 일본의 다재다능한 작가 릴리 프랭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릴리 프랭키는 작가로도 유명하지만 삽화가이자 배우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본명은 나타가와 마사야(中川 雅也). 2005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건 단 한 줄의 소개 때문이었다.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전철 안에서 읽는 건 위험하다.’ 이 한 문장에 홀려 책을 읽었고 지금은 내.. 더보기
최은영, 그 여름 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그 위선적인 말들을 이경은 기억한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이에게 이경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수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 더보기
부대찌개와 꿀꿀이 죽 부대찌개는 김치와 돼지고기, 햄, 소시지, 라면 등의 재료로 끓여 낸 찌개다. 김치에서 나오는 칼칼함과 가공육에서 나오는 특유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다.재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먹기 시작한 음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 직후 먹던 꿀꿀이죽을 부대찌개의 원형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 꿀꿀이 죽은 한국전쟁 직후 미군이 버린 음식을 한데 모아 끓인 음식이다. 꿀꿀이죽이라 이름 붙은 것도 모양새가 꼭 돼지나 먹을 것 같은 모습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꿀꿀이죽에는 정해진 조리법이 존재하지 않는데 먹을 만한 걸 모아 끓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꿀꿀이죽에는 이 자국이 남은 햄이나 소시지가 들어있기도 했고, 담배꽁초나 껌, 비닐 같은 .. 더보기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_본문에서 김영하 작가 소설 중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은 책이다. 몇 번 그의 다른 소설을 본 적 있지만 정서와 안 맞아서인지 매번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핑계에 불과하고 지금보다 혈기왕성할 때라 책보다는 조금 더 재미있는 걸 찾아 나섰던 것 같다. 하여튼 김영하 작가의 소설 중 끝까지 다 읽은 건 이 책이 최초다. 소설의 화자인 김.. 더보기
김영하, 오직 두 사람 그해 여름, 주말의 대형마트는 혼잡했다. 명절이 코앞이었다. 윤석과 아내 미라, 그리고 세 돌을 갓 지난 아들 성민을 태운 쇼핑 카트가 무빙워크를 타고 지하에 있는 매장을 향해 내려간다. 남은 평생 동안 반복하여 떠올리게 될 장면이지만 그때로써는 알 리가 없다. (중략) 보안요원을 따라 들어간 방에는 수십 대의 모니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니터들은 오직 대형마트 안의 매대들만을 비추고 있었다. 외부 임대 매장인 휴대폰 가게를 비추는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이 매장 안으로 벌써 세 번째 울려퍼졌다. 반향은 없었다. 방목하는 양떼처럼, 수백 대의 카트들이 매장 안을 평화롭게 소요하고 있었다. 미라는 그들 사이로 헤치고 들어가 소리치고 싶었다. 왜 아무도 방송을 듣지 않아요? 여러분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