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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클수록 클래식

나는 슈만을 싫어했다.



굴렌굴드는 슈베르트를 싫어했다. 슈베르트가 주로 즐겨쓰는 반복적 구조의 패턴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겹고 어색하기까지 해서 연주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7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리히테르의 연주를 듣고 그는 완전한 황홀경에 빠진다. 상당히 느린 템포로 전개되면서 즉흥적으로 변칙을 가미하는, 곡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고 나아가는 방식에 슈베르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음악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슈만을 싫어했다. 슈만으로 인해 새로운 클래식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곡에서 보여주는 정체성이란 무언가 이건 이것이다라고 명쾌히 보여주는 맛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서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슈만 피협 실황을 듣고 어 이것봐라하는 느낌이 와닿았다. 도마위에 상큼한 야채가지를 올려두고 송송송송 썰어가듯 건반을 시원하고 줄기차게 밀고가는 방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고전에서 낭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안감이 낳은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식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그 곡을 듣고 이해했다. 여러 피아니스트들을 듣고 있는데 박종훈의 앨범은 없고, 아르헤리치의 해석이 가장 풍만하고, 엘렌 그리모의 해석이 호방성이 두드러져서 그 두 곡만 계속 비교해보고 있다.

어떤 계기가 사람을 다시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