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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클수록 클래식

또 한명의 쇼팽, 게자 안다. ​ 통틀어 보건대, '쇼팽의 바이블'에 있어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초기 프렐류드 전곡, 에뛰드 전곡, 피협 1번을 들어보면 알파고도 이 정도 수준의 명료하고 정확한 기교는 따라올 수 없을 경지임을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지금은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 그 옛날의 짱짱함을 내려놓은지 오래되었지만, 적어도 마흔 이전의 폴리니는 쇼팽 연주에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 전주곡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오직 작곡가가 남긴 음표만을 보고 내린 해석'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곡 그 자체의 발현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여보게 쇼팽은 나요!' 하는 또 한 사람을 확인했다. 모차르트의 대가 게자 안다. 교보문고에 갔다가 게자 안.. 더보기
쇼팽 스페셜리스트, 타마슈 바샤리의 철학 ​ “베토벤을 못치면 쇼팽도 못친다” 20세기 최고의 쇼팽 스페셜리스트 타마슈 바샤리의 말에 공감한다. ‘모차르트 없이 베토벤도 없다’는 내 평소의 생각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듯 하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6개의 독일무곡] 만 자세히 들어봐도, 베토벤의 피아노곡 중 상당부분이 모차르트의 화성법에서 진보되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바샤리는 전체 구도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면 무엇이든 대입시킬 수 있다는 것을 라흐마니노프 피협 연주로 증명했다. 협주곡 3번 카덴차 ossia 부분을 들었을 때, ‘최고의 낭만주의자’는 ‘최후의 낭만주의자’이기도 하구나 싶었다. 타건과 터치 모두 섬세하면서도 매우 도발적인, 흔한 말로 곡을 엿가락처럼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피아노의 귀신’ 프란츠 리스트에 이어 졸탄 코다이와 벨.. 더보기
랑랑의 차이코프스키 ‘둠카’ ​ 새벽에 종종 차이코프스키의 둠카를 듣곤 한다. 랑랑의 서정적인 멜로디를 듣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이스탄불의 밤하늘이 떠오른다. 한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마치 가본 것 같은 묘한 환상을 준다. 터번을 두른 덥수룩한 수염의 할아버지 한분이 보인다. 모닥불 옆에 낙타 한 마리가 매어 있다. 따듯한 담요 하나 두르고 불쏘시개로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으면 스르르 깊은 잠에 든다. 위안의 곡, 위로의 곡이다. 더보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발터 기제킹 ​ “나비는 왜 계속 수집하는 거에요?” 부인이 묻자 발터 기제킹은 짧게 대답했다. “손가락이 아주 예민해지니까.” 그는 손가락 뿐만 아니라 발가락도 예민했다. 피아노의 페더링을 반의 반 정도 살살살 밟아가며 현과 마주치는 묘한 지점에서 악보를 훑어내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그가 ‘페더링의 화가’라는 별칭을 갖은 이유이다. 악보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일말의 MSG도 없는 깔끔한 연주. 그 바탕에 곤충학자였던 아버지가 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자연에 나가 함께 곤충을 채집했는데, 특히 나비에 관심이 많았다. 수집을 넘어 본인이 나비의 종을 두 개나 발굴했을 정도다. 이 정도면 가업을 이어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살금살금 까치발로 다가가 살포.. 더보기
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 나 대신 울어준 공연이었다. ​ 나 대신 울어준 리사이틀이었다. 마지막 앵콜곡 브람스의 인터메조는 너무 슬퍼서 공연장을 빠져 나오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김선욱은 서른에 접어드는 지금부터가 애매한 시기라고 했다. 20대의 신동도, 그렇다고 중년의 거장이라 불리기에도 다소 어정쩡한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불확실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꾸준히 연구할 수 밖에 없고, 여기에서 필요한 건 과연 어디에 초점을 두고 메세지를 던질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 리사이틀의 주제는 우리 세대의 슬픔이었다고 생각한다. '2~3년 후의 나는 무엇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한 그의 말대로, 혼란 속에서 밀려오는 고뇌와 좌절, 그것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버티고 분노하고 격정하는 고단한 일상의 수행을 한 음 한.. 더보기
[태교 음악 - 말러 피아노 사중주] ​ 간밤에 쌓아둔 책 더미를 밀어내고 아내가 커피 한잔 내준다. 오늘의 커피는 에디오피아 모모라 내추럴. "감사합니다" 하고 옆으로 몸을 뉘어 조르륵 커피를 따라 한 모금 퍼뜨린다. '커피 배트맨'이 제공하는 원두는 시중의 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윽한 향미가 금새 온 방을 감싼다. 아내는 아침부터 양갱을 만든다며 급하게 부엌으로 갔다. 말러 피아노 사중주를 틀어놨구나. 어제 본 셔터 아일랜드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온 곡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영화는 영화고, 음악은 음악이라는 점이다. 영화가 음울하다 하여 음악까지 도매급으로 팔아버려서는 안된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가 어우러져 반복적인 패턴을 유지하며 나아간다. 말러는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실내.. 더보기
러시아 혁명만큼 강력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혁명’ ​ 1918년 5월,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탈출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뉴욕에서의 데뷔 연주회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현지 비평가들은 그의 음악을 깊이 없는 싸구려 잔술 정도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쇤베르크를 하나, 그리고 사티를 약간, 다시 슈만을 한 방울, 그리고 얼마쯤의 스크리아빈과 스트라빈스키를 부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과 상당히 닮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까지 폄하했다. 당시 매우 보수적이었던 미국으로서는 그의 음악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너무나 변칙적인 음악세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날 프로코피예프는 현대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러시아 음악계의 선각자로 통하고 있다. 그의 피아.. 더보기
나는 슈만을 싫어했다. ​ 굴렌굴드는 슈베르트를 싫어했다. 슈베르트가 주로 즐겨쓰는 반복적 구조의 패턴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겹고 어색하기까지 해서 연주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7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리히테르의 연주를 듣고 그는 완전한 황홀경에 빠진다. 상당히 느린 템포로 전개되면서 즉흥적으로 변칙을 가미하는, 곡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고 나아가는 방식에 슈베르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음악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슈만을 싫어했다. 슈만으로 인해 새로운 클래식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곡에서 보여주는 정체성이란 무언가 이건 이것이다라고 명쾌히 보여주는 맛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서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슈만 피협 실황을 듣고 어 이것봐라하는 느낌이 와닿았.. 더보기
여름 풀벌레 소리, 밤의 가스파르 ​ 석양이 지기시작할 무렵부터 어스름이 물러날 때까지 풀벌레 소리는 줄기차기만 하다. 잎새 마디마디에 서로가 엉겨앉아 부르는 합창은 일종의 간절한 주문과도 같다. 밤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고전적인 마법이다. 밤의 가스파르를 듣고 있자면 나는 여름내음이 난다. 라벨은 여름밤의 선율에 비밀스러운 환타지가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가 가장 마음에 닿는다. 시작부에서부터 32박자의 이 자글자글대는 녀석들의 왁자지껄함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겨울에 들어도 이 놈들이 살아돌아올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한 인류학자를 불쌍히 여긴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듣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더보기
브람스를 바라보는 두 남자, 리히터와 백건우 ​ 한 대가의 일대기를 극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도 감상의 즐거움 중 하나다. 브람스의 두 앨범이 여기 있다. 하나는 리히테르가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1,2번이고, 다른 하나는 백건우가 연주한 브람스 간주곡, 카프리치오, 로망스다. 전자는 한 인간의 음악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곡이고, 후자는 '음악적 죽음'을 예감한 한 인간이 음악 인생을 정리해 내려간 마지막 회고작이다. 지금은 19살의 브람스가 더 끌린다. 바흐와 베토벤을 철저히 흡수한 한 청년의 소나타를 들은 슈만은 "이 시대의 새로운 이상향을 이끌어 갈 독수리"라고 극찬했다. 탄탄한 구도, 튕겨나갈듯 강렬한 타건이 온몸에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브람스 말년의 간주곡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 싶을 장도로 모.. 더보기